[호남정맥과 인물]남쪽땅을 새롭게 열고자 한, 김개남(開南)장군

2010년 1월 7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과 인물]남쪽땅을 새롭게 열고자 한, 김개남(開南)장군  

-한승우 사무국장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혁명의 세 주역이 전봉준장군과 김개남, 손화중 장군이다. 1894년 3월, 1차 백산 농민봉기 때에 세 사람은 각각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으로 김개남, 손화중이 추대되었다. 특히, 같은 동네에서 청년시절을 함께 보낸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은 격동기에 운명을 같이 한 동지이자 라이벌이었으며, 김개남 장군을 사람들은 강경파로 분류한다.

[imgleft|20050822173802_808_1.jpg|200| |0|1]김개남 장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이 김개남 장군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후손 중에는 김개남 장군이 당초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에 부모가 현재의 지금실 마을로 이사하여 살게 된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한다. 지금실과 원정마을은 둘 다 호남정맥의 묵방산에서 분기한 모악기맥이 모악산으로 향하다 국사봉에서 서쪽으로 나뉘어진 상두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동학혁명 1차 봉기 시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 호남우도를 휩쓸고 마침내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에 놀란 조정에서 농민군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청나라에 이어 일본군까지 조선에 상륙하자, 동학농민군은 외세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조정에 폐정개혁안을 요구하고 조정과 전주화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폐정개혁안을 요구하고 조정과의 화약을 추진한 전봉준장군과 달리 김개남장군은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해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결국 전주화약이 체결되고, 민정개혁을 위한 ‘집강소-최초의 민정자치기구’가 호남의 군현에 설치되었다. 전주화약이후 집강소 설치를 거부한 남원부를 정벌한 김개남장군은 남원에 호남좌도 대도소를 설치하고 금산, 진안, 임실, 순창, 담양, 곡성, 구례 등의 호남좌도를 관할했으며, 영호도회소를 순천에 설치하여 진주, 함양 등 경상도의 남서부일대까지 통치했다.

청나라군대의 입국을 빌미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이 강제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척양척왜(斥洋斥倭)’, 외세를 척결할 것을 기치로 내걸고 1894년 9월, 2차 봉기를 하게 된다. 전봉준 장군은 삼례에서 동학농민군을 집결시키고, 그 동안 무장봉기에 소극적이었던 동학의 북접 손병희와 최시형교주를 설득하여 마침내 남북접 20만 농민군을 조직하여 공주로 향한다. 그러나, 김개남 장군은 전봉준장군과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동학군을 이끌고 전주를 거쳐 청주로 향한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공주의 우금치와 청주에서 패한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은 후일을 기약하며 농민군을 해산한다. 김개남은 정읍 산내면 종성리의 매부집으로 숨었으나, 밀고로 관군에 잡혀 전주로 이송되고 전주 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참수된다. 특히, 김개남 군은 노비 등 천민들이 주축을 이루어 관에 비타협적이고 양반에게 적대적이었다. 때문에 부패한 관리들과 양반유림의 반감을 많이 샀다. 김개남은 구한말 봉건적인 유림이자 민족주의 의병장인 임병찬의 밀고로 피체되어 전라감사 이도재와 양반들에 의해 42세의 나이로 남녘땅을 새롭게 열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꽃같은 생을 마감했다.

/ 2009년 12월 25일  새전북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