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역사]호남정맥과 임진왜란

2009년 10월 9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과 임진왜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주줄산(다른 이름 주화산·568m)에서 호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6㎞ 정도를 내려가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신작로길, 곰티재가 나오고 곰티재에는 웅치전적비가 우뚝 서있다. 곰티재는 서쪽으로 완주군 소양을 거쳐 전주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쪽으로는 진안을 거쳐 금산 또는 육십령을 거쳐 경상도로 향하는 길목이다.

[imgleft|312710_39656_293.jpg|300| |0|1]웅치전적비는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으로 향하던 왜군에 맞서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을 기리고 웅치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초 호남을 방어하고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으며, 호남정맥의 역사성을 일깨워주는 의미 있는 전투라 할 수 있다.

1592년 4월 왜군은 조선을 침략하고 개전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하였다. 임진란 2개월 만인 6월 15일 왜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6월말 경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8도가 왜군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조선8도를 분할 점령·통치할 것을 결정하였고, 소조천융경은 1만5,000여명의 왜군을 거느리고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5월 25일 임진강을 떠나 전라도로 남하하였다.

6월말 소조천융경은 호남의 금산지역을 점령하고 용담, 진안을 거쳐 전라감영인 전주로 향하기 위해 진안으로 진군한다. 마침내 1592년 7월 8일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왜군은 진안현에서 웅치로 진격하였으나,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의 활약에 큰 타격을 입는다. 치열한 전투 끝에 비록 웅치전투에서 호남의 관군과 의병이 패하기는 하였지만 왜군의 전력에 큰 손실을 입혀 왜군은 전주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안덕원에서 조선군에 패하여 후퇴하기에 이른다.

또한 웅치전투에서 패퇴한 왜군은 7월 말경 전력을 보강해 금산에서 진산을 거쳐 전주로 재차 진격을 시도한다. 금남정맥상에 위치한 대둔산의 이치(배티재)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의 활약으로 왜군은 크게 패하고 금산으로 물러갔으니 이후 임진왜란 5년 동안 왜군은 전라도를 침략하지 못했으며, 호남지역은 조선을 되찾는 토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금산, 진안, 무주 등을 제외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안쪽의 전라도가 침범을 당하지 않았다.

웅치와 이치전투 못지않게 임진왜란 때 호남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1,2차에 걸친 진주성 전투이다. 동서를 가로막는 백두대간으로 인해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지리산남쪽의 남해안지역으로 침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진주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남해안지역의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2차 진주성전투는 전투를 벌인 장군과 병사들이 대부분 전라도지역의 관군과 의병이라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등이 모두 호남지역의 의병장들이었으니 호남의 의병들이 경상도까지 원정해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호남지역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웅치와 이치,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지 호남지역으로 진군하던 왜군을 막아낸 특정한 지역이라는 전적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지금의 노령산맥이나 소백산맥 같은 산맥개념이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비밀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우리나라의 중심 산줄기를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등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인식했으며, 이를 정리한 지리서가 산경도이다. 즉, 산경도는 우리나라의 중심 산줄기를 정리한 것이다. 웅치는 호남정맥상에 위치한 진안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이치는 금남정맥상의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진주성은 높은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끝나는 남쪽에 위치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바로 이점에 주의해야한다.

결국, 임진왜란당시 조선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백두대간으로 둘러싸인 호남지역이 지켜짐으로써, 호남지역을 근거지로해서 조선의 식량을 보급하고 의병과 관군이 호남 외 지역으로 출병하여 조선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권율장군의 행주산성 전투도 전라도순찰사로서 권율이 전라도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한양을 재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원정투쟁을 벌인 결과이다.

과거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높은 산줄기는 사람들의 생활을 나누었고,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모여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때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등 높은 산줄기는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 통행에 불편함이 많았으니, 군사적으로는 천연의 방어막이 되었다. 이러한 천연의 방어막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 웅치와 이치의 전투이며, 이를 이용하지 못한 것이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 고개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산맥 개념인 태백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으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조상들의 전통적인 산줄기 인식인 산경도의 백두대간, 호남정맥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서려있다. 우리 호남의 선조들은 왜군을 호남정맥의 곰티재(웅치)에서 막아냈고, 금남정맥의 배티재(이치)에서 몰아냈다. 참 쉽다. 우리는 백여 년간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살고 있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