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인물]3.1운동의 막후기둥 – 백용성 조사

2009년 7월 13일 | 회원소모임

백용성 조사(祖師)

/ 유달리 회원

백용성 조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었으며, 일제시대에는 3․1독립운동의 막후기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imgright|2009071274150.jpg|300| |0|1]백용성조사는 1864년 호남정맥의 종산인 장안산 남쪽자락인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 남원의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였으나 부모의 극구만류로 귀가하였다가 16세에 다시 출가해 해인사에서 불문에 입문하였으며, 그 후 전국과 중국의 사찰을 돌며 수행하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로 활약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은 모두 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도교 인사 16명, 기독교인사 15명, 불교계인사가 2명이다. 각 종단을 대표해 천도교 손병희 교주가 1번, 기독교장로회 길선주 목사 2번, 기독교감리파 이필주목사 3번, 불교계 백용성 조사가 4번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때문에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 선생이 이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반외세의 기조 아래 서학(西學:기독교)에 대립하여 민족 고유의 종교임을 내세우는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용성 조사는 이런 적대적인 두 종교 간의 관계를 조정하여 대연합전선을 구축, 독립선언서가 탄생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3․1운동과 관련된 흥미 있는 일화가 있다. 서울 종로의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참석하여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각 종교를 대표한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그대로 흩어지면 독립만세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백용성조사가 기생을 시켜 대표들의 신발과 두루마기를 숨겨놓으라 하시고, 시자인 태현승려를 시켜 일본 헌병대와 종로경찰서에 신고토록 한 것이다.

이리하여 29명의 각 종교를 대표한 민족대표가 체포 연행되니 3천리 강산 2천만 동포가 한 물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은 이후 중국의 5.4청년운동, 인도의 독립운동 등 아시아의 비폭력 자주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사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가 사회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대처승을 인정하는 등 영향이 미치자 서울 종로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불교개혁과 민족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각사에서는 <화엄경> 등 30여 종의 경전을 번역하여 한글화 하였으며, 이는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 항일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또 일요 어린이 법회 개설, 거리 포교, 찬불가 도입 등 불교를 대중화·현대화하는데 힘썼다.

특히, 조사는 승려들이 참선뿐만이 아니라 직접 노동을 하여 사원경제를 자립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운동을 펼쳤으며, 직접 함양과 만주에 농장을 설립하여 선농불교운동에 앞장섰다. 여기에서 나온 수익금을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으며, 윤봉길 의사를 상해로 파견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