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문화] 동편제와 서편제

2010년 8월 31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과 문화] 동편제와 서편제

고 김대중 대통령조차 극장을 찾아 감상했던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은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허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없고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라고 서편제와 동편제의 차이를 설명한다.

[img|342794_49209_4150.jpg|600|한치재에서 삼수마을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마루금|0|1]
제(制)는 판소리가 전승되면서 전승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음악적 특성에 차이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를 제라고 한다. 그런데, 하필 동편제와 서편제라 구분하였을까? 그리고 동과서의 기준선은 어디인가? ‘제’라는 용어는 1940년에 출간된 ‘조선창극사’에 처음 등장한다. 19세기 중반부터 판소리를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의 문헌에는 동편제와 서편제는 물론 제라는 단어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편제와 서편제 등의 판소리 유파의 분화는 19세기 후반에 발생하여 20세기에 개념이 정리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동편제는 웅장하고 감정을 절제하여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면 서편제는 여성스럽고 한이 담겨있으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으로 대비시키고 있으며, 발성법에 있어서도 동편제가 구절의 끝마침이 쇠망치로 내려치듯이 명확하고 상쾌하다면, 서편제는 구절의 끝마침이 좀 길게 끌어서 꽁지가 붙어 다닌다고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동편제와 서편제 이외에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고제가 있었으나, 중고제는 ‘비동비서’로 뚜렷한 특징이 없으며 오히려 동편제에 가깝다며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지역적 구분에 대해서는 조선창극사에서 “동서의 유래는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하여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지를 동편이라 하고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하여 광주, 나주, 보성 등지를 서편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지역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법제만을 표준하여 분화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동편제와 서편제 분화의 지역적 구분을 남원 운봉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의 동쪽 지역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인 광주, 나주, 보성과 같은 곳에서는 서편제가 많이 불렸고, 섬진강 동쪽의 운봉, 구례, 순창과 같은 곳에서는 동편제가 많이 불렸다”고 지역적 기준을 섬진강으로 보다 분명히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과서의 기준을 섬진강으로 구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부분의 문화는 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마련인데 섬진강 본류를 경계로 문화가 나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됀다. 실제 서편제가 광주, 나주, 보성, 화순, 담양, 해남 등지로 전승되고 동편제가 남원, 구례, 순창, 고창, 곡성 등지로 전승되는데 순창이나 곡성 등은 주로 섬진강의 동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히려, 동편제와 서편제의 지역적 분류를 호남정맥으로 하면 보다 정확성이 높아진다. 광주, 나주, 화순, 담양, 해남 등지는 호남정맥의 서쪽이다. 또한 순창, 구례, 곡성, 남원은 호남정맥의 동쪽이다. 그러나, 동편제에 속한 흥덕(고창)은 호남정맥의 서쪽에 있고, 서편제에 속한 보성은 오히려 호남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면이 있다. 일단 동편제로 분류한 고창지역의 경우 동편제와 서편제로 유파가 형성되기 전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이 살던 지역이다. 신재효 선생은 명창이 아니라 판소리 연구가이지만 문하에서 소리꾼을 길러냈다. 동편제의 김세종 등이 그의 대표적 문하생이다.

동편제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송흥록 명창은 남원 운봉에서 1780년에 태어났으며 1801년부터 1863년까지 활약하였다. 반면 서편제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박유전 명창은 1835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25세의 나이에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일약 톱스타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박유전은 대원군의 실각과 입각에 따라 한양을 오르내렸으며, 대원군이 마지막으로 실각하고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한 후 세상을 떠돌다 1890년대 후반 죽었다는 설과 보성으로 귀향하여 1906년경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즉, 19세기에는 동편제류의 판소리가 주류를 이루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서편제가 등장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재효 선생이 활동 시 동편제류의 판소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고, 아직 서편제는 분화하지 않은 시기로 고창지역이 우리나라 판소리를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의 고향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동편제가 전승되지 않았나 판단된다.

[img|342794_49217_4320.jpg|600|문학작품에서 흔히 민초를 지칭하는 패랭이꽃|0|1]
반면 보성지역의 경우는 지형이 복잡하고 박유전 선생의 활동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보성지역이 서편제로 분화된 과정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우선 박유전 선생이 청년기까지 순창에서 보냈으며, 10대 후반에 보성(당시 장흥)으로 이사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이나 소리를 어디서 누구로부터 사사받았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성인기 보성에서 보낸 시기도 짧아 박유전 선생의 거주사실만으로 보성을 서편제의 고장으로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박유전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전승한 정재근 명창은 보성군 회천면(당시 장흥군 회령면)으로 지역기록이 명확하고 이후 회천지역을 중심으로 보성소리가 계승된 사실도 명확하다. 나주에서 박유전 선생을 모시고 정재근 명창이 이사한 당시 장흥 회령면은 호남정맥의 서쪽으로 명확하게 서편제로 분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창지역의 경우 호남정맥의 서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전체적으로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의 영향으로 동편제 소리가 맥을 이어온 것으로 판단되며, 보성읍내의 경우 호남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나 주요한 전승자들이 살았던 곳은 호남정맥의 서쪽인 보성군 회천면(1914년 이전 장흥군 회령면)으로 실제적인 전승지역으로 볼 때 호남정맥의 서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동편제와 서편제 등으로 소리가 다양화 되었다. 그러나, 판소리의 경우 마을과 지역중심으로 전승되는 농악과 달리 명창을 중심으로 소수에 의해 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지역적 구분이 쉽지 않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 교통의 발달과 소리문화의 도시화 등으로 지역적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만, 서편제와 동편제의 지역적 구분이 20세기 전반까지 발생과 전승되었던 지역으로 볼 때 대개는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동편제는 동쪽, 서편제는 서쪽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