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인물]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

2010년 3월 12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과 인물] 조국 독립위해 변론운동 벌인 가인 김병로 선생  

2010년 03월 05일 (금)  새전북신문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 이 말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의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 는 불평에 대해 쏘아 붙인 응답이다.  [imgright|326610_42797_539.jpg|200| |0|1]  현재의 대법원이나 사법부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의연함과 기상, 유쾌함이 느껴진다. 여전히 3권 분립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대통령을 향해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고 호통을 칠 수 있는 대법원장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다.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은 격변기인 1887년 12월 15일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복흥면 하리는 호남정맥의 추령봉(573m)에서 분기한 산자락이 백봉산(668m), 소백산(540m)으로 이어지다 옥녀봉(530m)이 추령천을 만나 기운을 풀어 놓은 곳이다. 선생의 호인 가인(街人)은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선생님의 겸손함과 청렴함이 드러난다.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훼손하며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용추사에서 거의를 주장하는 최익현 선생의 연설에 감화 받아 가인은 의병활동에 가담한다. 1906년 태인(현재의 정읍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 임병찬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거의한 의병에 선생은 18살의 나이로 동참한다. 그러나,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진압하러온 관군과 맞닿뜨려 같은 조선인끼리 싸움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병을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방황을 하다 다시 김동신 의병부대에 동참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일본군의 호남의병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무력투쟁을 접고 교육과 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공부를 위해 전남의 창평학교에 입학한다. 창평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선생은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해 민족정기를 회복하면서 조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91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한다. 선생은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변론운동에 뜻을 세운다. 191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선생은 경성전수학교 조교수,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의 판사 등을 역임하고 1919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 본격적인 변호와 사회운동을 벌이게 된다.

선생은 의열단 사건, 6·10만세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간도 공산당 사건, 안창호의 이토히로부미 저격 등 시국사건에 대하여 무료로 변론을 담당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대변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작쟁의를 벌인 농민, 원산부두 노동자 파업 등 농민과 노동자의 변론을 맡는 등 민중들과 어려움을 함께하고자 했다. 선생은 변론운동 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한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일제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1년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는 등 일제의 탄압으로 변론운동조차도 어렵게 되자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선생은 미군정청의 사법부장,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대법원장에 취임하여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초를 닫는 역할을 하였다.

선생은 대쪽 같은 선비정신과 민족애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을 위한 변론, 사회,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독립이후에도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확립하고 민주주의와 민족정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정을 행하기보다는 굶어서 죽는 편이 영광’이라는 선생의 말이 평생을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다간 족적을 짐작케 한다. 젊은 법조인들이 호남정맥과 가인연수원에서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길 바래본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