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인물] 녹두, 전봉준 장군

2010년 2월 8일 | 회원소모임

녹두, 전봉준 장군  

2010년 01월 22일  새전북신문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동학농민혁명의 총대장 전봉준 장군은 키가 5척 단신이라 어려서부터 녹두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855년 출생한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호남정맥의 명산인 내장산이 서해바다를 향해 내리뻗어 입암산, 방장산으로 이어지고 방문산아래 고창천을 맞아 풀어내린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 출생지이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전주, 태인으로 이사를 다녔으며, 청년기에 정읍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로 이사하여 한 살 차이의 김개남 장군과 같은 마을에서 성장했다.

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19세기말 조선은 조정에서는 세도정치로 시끄럽고, 지방에서는 부패한 관리들에 의한 민중에 대한 착취가 극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호시탐탐 침략을 일삼던 국권이 바람앞의 등잔불 같은 혼란기였다.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는 봉건왕조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시대로 바뀌는 과도기였다. 특히, 고부군과 김제, 익산 등 호남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탐학한 관리들이 선호하던 지역이었는데, 당시 한양의 양반들에겐 호남지역에서 관리를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그 만큼 호남지역 농민에 대한 착취가 극심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세금을 중과함은 물론 만석보라 불리는 예동보 밑에 불필요하게 새로운 보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농민들을 돈도 주지 않고 부려먹는가 하면, 보의 윗 두락에는 두락 당 2말의 쌀 아랫두락의 논에는 1말의 말을 세금으로 매겼다. 이렇게 걷어 들인 보세를 예동(禮洞) 두전(斗田) 백산(白山, 현 부안군) 세 곳에 700여 석을 쌓아 놓으니 농민들의 원성이 들끌었다. 더욱이, 새로운 보는 너무 높게 만들어 홍수가 지면 오히려 물이 범람하여 농사에 피해를 주어 더더욱 농민들의 원성은 비등했다.

결국, 지역의 농민들이 군수에게 상소를 올려 진정키로 하고 1893년 11월 군민 40여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보세감면을 진정했으나, 고부군수는 오히려 주동자 3명을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 백성을 모두 두들겨 쫒아 버렸다. 주동자인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비롯한 세 명에 대하여 전라감사 김문현이 백성을 충동질해 난을 일으켰다고 엄벌을 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고부군에서 중장에 쳐해 옥에 가두었으나 전창혁은 옥중에서 매를 맞고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농민들의 진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번번히 쫓겨났으며, 진정으로는 농민들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농민들이 직접 포악한 관리를 농민의 힘으로 징치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전봉준과 지역의 토호인 송두호의 주도로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고부면 신중리) 송두호의 집에서 봉기의 거사를 정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동학의 집강 등 뜻있는 사람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1894년 1월 마침내 고부농민봉기에 이른 것이다. 전봉준은 1894년 정월 10일, 배들평을 중심으로 한 10개 부락의 농악을 동원 수천명의 농민을 모아 놓고 조병갑에 대한 징치를 역설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자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보를 허물고, 창고에 쌓아놓았던 보세곡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대략의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다. 120여년 전의 일이지만 요즘 돌아가는 세상사와 많이 닮았다. 국민들의 생활도 어려운데 명분도 없이 막대한 국민 세금을 들여 보를 만든다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전봉준 장군이 다시 환생한다면 요즘 세상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쩌면 120여년 전의 일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