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역사]동학혁명의 열기도 백두대간을 넘지 못해

2010년 1월 14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과 역사]동학혁명의 열기도 백두대간을 넘지 못해  

2010년 01월 08일 (금) 새전북신문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왜척양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봉건사회의 구습을 타파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농민혁명이자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애의 발로였다. 비록 갑오농민혁명은 근대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자주국가임을 포기한 관군의 협공으로 진압 당했으나 동학농민군의 평등과 자유의 정신은 우리민족과 역사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외세의 간섭과 더불어 동학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상이었으며, 또 한편 농민혁명이 호남과 충청 등 우리나라의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전국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한계 때문이다.

1894년 3월, 1차 백산봉기 시 농민군은 고부군 황토현에서 처음 관군을 격파한 이후 곧바로 전주와 한양으로 향하지 않고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장성으로 남진하여 호남지역을 휩쓸었다. 그리고 장성의 황룡전투에서 또다시 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몰아 마침내 기수를 북으로 돌렸으며, 장성 갈재(노령)를 넘어 정읍을 거쳐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이 1차 봉기 시 호남지역을 휩쓸었음에도 불구하고 진격로는 호남정맥의 서쪽 평야지역에 국한돼 있는 것은 농민군의 전력과 무장상태가 호남정맥을 넘나들기에는 매우 부족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런데, 농민군이 노령산맥의 이름유래인 노령(장성 갈재)을 넘어 전주로 입성했는데 이는 노령이 낮은 고개에 불과하고 노령산맥이 우리의 지형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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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정맥에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갑오농민혁명 당시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전봉준 장군이 피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남정맥의 복룡재. 지금은 새로운 도로가 건설중이다/황성은 기자  

한편, 갑오동학농민군은 외세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전주성 점령이후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하지 않고, 조정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협상을 벌여, 비로소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의 각 군현에 민정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정개혁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남원과 운봉, 나주 등의 관청이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자 동학농민군의 김개남과 최경천 군이 남원과 나주로 출병한다. 결국 남원으로 떠난 김개남군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이어 운봉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여원치 고개로 향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여원치에서 운봉의 관군과 지역 토호인 박봉양을 중심으로 한 민보군에 막혀 대패하고 결국 운봉을 함락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개남 군은 비록 여원치를 넘지 못했으나, 전라도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하동과 산청, 함양, 진주 등 경상도의 서남부지역을 평정하고 관할하였다. 이처럼 당시 맹위를 떨치던 김개남 군조차 넘지 못했던 여원치는 바로 백두대간의 높은 고개이다. 운봉이 같은 호남지역이었지만 농민군이 백두대간을 넘기에는 전력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끝자락, 지리산을 우회한 경상도 서남부지역에서는 동학군이 세력을 펼 칠 수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1894년 9월 삼례를 시작으로 동학의 최시형 교주의 교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무장봉기를 한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 영서지역을 제외한 경상도와 영동지방, 함경도 등지에서의 동학농민군의 활약은 미미했다. 바로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백두대간을 경계로 한 서쪽지역과 동쪽지역의 차이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열기조차 백두대간을 쉽게 넘지 못 했던 것이다. 이처럼, 호남정맥과 백두대간 등의 산경도는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의 태백산맥과 노령산맥 등 산맥도를 통해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전북녹색연합 한승우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