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인물] 해산(海山) 전기홍 의병장

2009년 12월 4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과 인물] 해산(海山) 전기홍 의병장  

/2009년 11월 27일  새전북신문

구한말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두 의병장이 이석용 장군과 전해산 장군이다. 두 장군 모두 전북 임실 출신이며 팔공산 자락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으로 넘기기엔 특별하다.

호남정맥의 고봉인 팔공산(1147.6m)의 서쪽으로 내리뻗은 산줄기가 영태산과 오봉산, 덕재산(483.8m)을 지나 오수천과 둔남천이 합류하는 임실군 오수에서 끝맺는다. 바로 이곳 임실군 오수면 국평리 고전동이 구한말 의병장 전해산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해산(海山) 전기홍장군은 1879년(고종16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예가 출중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와 역서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1895년 민비를 시해한 일본이 1905년에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어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았다. 이에 분개한 전해산은 본래 친분이 두터웠던 정재 이석용과 의기가 맞아 1907년 가을에 의병을 일으켰다. 바야흐로 1907년 9월 12일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이듬해 1908년 3월 남원의 사촌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할 때까지 주로 임실과 진안, 남원, 곡성 등 호남좌도지역을 중심으로 이석용장군과 전해산장군이 함께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남원전투에서 패한 후 대책을 논의한 결과, 이석용 장군이 “나는 북도에 근거를 두고 의군을 모아 힘을 길러서 기회를 기다리고, 형은 남도로 내려가서 김참봉과 합모하여 일을 할 경우 남과 북이 서로 의진한다면 성세가 저들과 겨룰만한 것이어서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오”라고 결정하고 전해산 장군은 전남 장성으로 떠났다.

전해산 장군은 1908년 7월 현재의 전남지방에서 흩어진 의병을 모아 ‘대동창의단’을 결성하고 영광의 불갑산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이후 함평, 광주 등으로 출격하였다. 전해산 장군은 특히 호남우도의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해안과 내륙 모든 곳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펼쳤다. 그가 자신의 호를 해산(海山)이라고 지은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전해산장군은 대동창의단 뿐만이 아니라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조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남동의단은 호남지방의 의병연합체와 같은 성격을 띤 조직으로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장들이 서로 유기적인 작전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전해산 장군을 호남동의단의 대장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 전해산이 의병들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해산장군의 의병진이 크게 활동을 벌였던 장성, 영광, 나주, 함평, 무안등지에서는 일본군과 경찰수비대들이 그 세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으며, 친일분자들도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해산장군의 명성은 호남일대에 신화처럼 퍼져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장성하면 전해산의 의병이 되라고 할 정도였으며, 세간에서는 그가 전봉준의 동생이라는 헛소문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1908년 10월부터 일본군이 1만여 명에 달하는 ‘호남의병토벌대’를 편성하여 호남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전해산 장군은 후일을 기약하며 일시 의병을 해산하고 장수군 번암면 동화리 고래산에서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불행히도 전해산장군은 1909년 10월 16일 배신자의 밀고로 고래산에서 체포되었으며, 1910년 7월 18일 대구형무소에서 32살의 젊은 나이에 일제에 의해 교수형으로 삶을 마무리했다.

/한승우 녹색연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