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마을이야기] 대성고원

2009년 7월 24일 | 회원소모임

[호남정맥 마을이야기] 대성고원
/한승우 사무국장

호남정맥상 팔공산(1151m)의 남서쪽 고산지대에 5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소위 ‘대성고원’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모두 해발 500m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필덕마을은 해발 600m가 넘는다.  대성고원은 행정구역상 장수군 장수읍 대성리와 식천리에 속해있으며, 대성리의 대성, 대덕, 필덕, 구평 등 4개의 마을과 식천리의 식천마을에는 현재 229세대 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대성리는 원래 큰됫골이라하여 대승곡(大升谷)이라 칭했다한다. 팔공산(1151)과 신무산(896), 개동산(846) 등에 둘러싸여 분지형 고원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큰 됫골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이와 같은 대승곡이 1914년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대성리(大成理)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성고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장수읍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해발 659m의 자고개를 넘어야 하며, 산서면에서는 해발 530m의 비행기재를 올라서야한다.

대성고원은 팔공산과 높은 산지지역에 독립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특성상, 6.25때에는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여, 주민들의 식량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빨치산과 관련된 책인 남부군에도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소속의 빨치산이 순창의 회문산에서 후퇴하면서 이곳 팔공산 주변에서 전전하며 활동했던 기록들이 있다. 팔공산의 서쪽과 서북쪽의 임실군 성수면 사근이골,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등이 빨치산이 머물렀던 아지트로 이용됐으며, 대성리 등이 소위 보급투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대성고원에는 인구가 많을 때는 2,500여명의 주민들이 살았고, 600여명의 학생이 있어 대성리에 대성초등학교와 식천리에 식천분교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인구감소와 함께 1998년 대성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행정구역상 장수읍에 해당하는 대성고원은 지형적으로 독립되어 있어 1971년에는 장수읍 대성출장소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인구감소와 도로의 개설로 1998년 대성출장소는 폐쇄되었다. 지금은 출장소와 학교도 없어 마을이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지역아동센터와 보건소 등이 설치되어 있어 독립성이 남아있다.

대성고원에서는 다른 장수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로 장수사과와 한우, 오미자, 논농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고랭지채소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무와 배추 등 고랭지채소와 일부 인삼재배를 하였으며, 고원지대임에도 물이 비교적 풍부하여 벼농사를 함께 짓고 살았다. 또한, 과거에는 필덕마을에는 금광이 있어 마을의 경제상황이 비교적 부유했다고 하며, 식천리에는 장수석기가 유명하다. 장수는 과거로부터 석기와 오미자가 특산물로 유명하다.

대성리는 ‘농업을 WTO에서 제외하라’며 2003년 WTO와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여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고 이경해열사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경해 열사는 이곳에서 낙농축산업을 하며, 한국농업경영인중앙협의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1991년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해 할복을 시도한 바 있었다. 대성고원에는 아직도 장수한우 등 축산업을 하시는 분이 많으며, 방목 흑돼지를 특화하여 어려운 농촌사정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분도 있었다.

특히, 방목 흑돼지를 사육하는 양승철(48)씨는 대성/식천 청년회 결성을 주도하고 대성고원을 친환경농업단지로 만들고자 뜻을 모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마을의 브랜드를 만들고자 ‘대성고원’이라는 표지석을 1994년 비행기재와 자고개에 직접 세웠다. 이때부터 이 지역은 비로소 대성고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표지석의 글씨도 청년회 회원들이 직접 정으로 새겼다고 한다. 이처럼 마을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서 특화하고, 꾸준히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농민들이 있어 대성고원의 앞날이 밝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