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인물] 논개

2009년 6월 29일 | 회원소모임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논개(論介)

[imgright|7.jpg|200| |0|1]1593년, 왜장의 허리춤을 붙잡은 채 차디 찬 푸른 강물로 몸을 던진 논개. 그녀의 열 손가락에는 굳은 다짐과 같이 단단한 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논개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입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녀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이견이 분분하다.

논개는 1574년 장수 장안산 자락의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일찍 아버지를 여읜 논개는 어머니와 함께 당시 현감이었던 최경회의 손에 거두어진다. 최경회는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논개가 고향을 떠나 진주로 간 것도 이때이다.

이후 최경회는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남강 촉석루에서 승전잔치를 벌인다. 승전잔치에 나타난 논개는 왜장을 유인해 장마로 물이 불어난 남강으로 왜장을 안은 채 투신을 한다. 호남정맥의 종산인 장안산 자락에서 태어난 논개는 높고도 높아 구름도 쉬어간다는 백두대간의 육십령을 넘어 300여 리 떨어진 진주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논개는 최경회 장군을 따라 백두대간을 넘어 진주성으로 갔다. 그런데 왜 최경회 장군은 전란 중에 호남우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성으로 가게 되었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이미 관직에서 물러난 최경회(61)는 1592년 모친 상중이었음에도 고향인 화순을 떠나 자신이 현감으로 근무하던 장수에서 의병을 조직한다. 이미 이때는 일본군이 조선을 평양까지 함락한 상황. 금산, 무주, 산음, 성주 등의 전투에서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운 최경회는 1593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하게 된다.

진주성 전투에서 각기 전라도 의병장 출신인 최경희, 김천일, 고종후 등이 10만의 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고 세 장군은 남강에 투신하게 된다. 진주성은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남해안지역의 교두보라 할 수 있는 위치이다. 왜군에 의해 점령되지 않은 호남지역의 의병과 관군들이 호남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경상도와 경기도 등 전국 각지로 원정투쟁을 나갔던 것이다.

꽃다운 논개가 육십 번의 작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험난한 백두대간 고갯길을 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험난한 고갯길 보다 고향땅을 등지고 생면부지의 낯선 곳으로 가는 마음이 더 험난했을지도 모른다. 의암 위에 홀로 서서 왜장을 불러들인 그녀의 붉은 마음이 더 선명해지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달리(전북녹색연합 회원)